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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연
  몸부림 쳤다.
  

'기독교 윤리학의 세계적인 석학',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그가 일군 학문적 금자탑 저편에는 심각한 정신병 환자인 아내로 인해 겪어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절망의 시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지난 2월 16부터 이틀간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의 주강사로 참석해 아내로 인해 겪었던 어려움을 담담히 고백했다. 그의 부인은 심한 조울증 환자였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고 고집하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잠들기를 거부하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보살펴야 했고,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아들을 아내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아내의 정신병으로 인해 미칠 듯한 고독함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진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우어워스 교수는 내러티브 형식을 자신의 주된 학문적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학자답게 이야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조명했다. 정신병 환자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과정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우어워스 교수는 이번 심포지움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강의했다. 강의 내용을 앞으로 네 번에 나눠 연재하고, 하우어워스 교수와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은 첫 번째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나는 아담과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달리기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나와 같이 정신질환자 가족을 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두었다. 나 역시 그런 가족의 일원으로 겪는 상실감과 고독감과 절망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이 약, 저 약을 시도해볼 때마다 조금은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거의 대부분 그런 희망은 헛된 꿈으로 판명 나곤 했다. 만약 당신이 정신질환자와 함께 산다면 희망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집에서는 5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함께 사는 누군가가 정신질환에 걸렸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인생이 계속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다면 살아남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더군다나 조울증(bipolar)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앤처럼 격심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결국 지쳐 쓰러졌던 것은 앤의 병이 아니라 앤의 분노였었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나를 지탱해준 에너지, 그 득과 실

나는 앤의 인생을 더 좋게 해주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기 수업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내가 그녀를 위해 했던 선한 일들은 상황을 항상 악화시키는 방향으로만 작용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유전으로 물려받은 에너지가 있었다. 나는 그 에너지 덕에 가르치고, 책을 쓰고 아담을 키우고 앤을 돌보는 일을 매일 매일 할 수 있었다. 에너지는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저주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에너지로 앤을 돌보는 동시에 앤이 퍼붓는 수많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가끔 나는 내가 에너지가 넘쳐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했던 그 상황이 앤을 망가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만약 내가 닥쳐오는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더라면, 앤이 조금 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게 됐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앤이 퍼붓는 수많은 저주와 악담을 묵묵히 견뎌내지 않고 비켜섰더라면, 앤이 나를 욕하는 길이 막다른 골목임을 깨닫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었을까. 여하튼 좋던 나쁘던 나는 버텨나갈 에너지가 있었다.

나 자신도 왜 계속 이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없다. 누구라도 당신이 사랑하는 이의 정신질환이 폭발하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면,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앤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 알지 못했다. 앤은 자주 우리를 남편과 부인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못 박곤 했다.

앤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관계로 나와 자는 것을 간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가끔 다른 여자와 사귀어 보라고 권유하곤 했다. 앤이 나와 "사랑을 나눌"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의 원칙이 너무나 수준 높아 나와의 관계를 허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결혼한 유부남"이었지만 수도승처럼 살아야 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 무엇이겠나. 가끔씩 그녀는 나와 관계를 갖길 원할 때도 있었다. 앤이 나와 관계를 요구하는 시점은 대강의 경우 그녀가 또 다른 정신 발작을 앞에 두고 있다는 표시였다. 일 년 내내 성욕이 끓어 넘치는 나였지만, 그녀가 "그녀 자신"이 아닌 상태를 악용해 성욕을 해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섹스보다 그리웠던 손길

나는 누군가가 나를 유혹해주길 상상하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어떤 신호를 사람들에게 보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난 꼬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었나 보다. 또한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혼외 관계가 몰고 올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바람이나 피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말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겠나.

물론 나는 섹스가 그리웠다. 사실 섹스보다 더 그리웠던 것은 손길이었다. 앤은 나를 건넌방에서 자게 만들었다. 앤이 나를 만져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만져주는 것도 그리웠지만 더욱 그리웠던 것은 다정다감함의 표현이었다. 그저 아주 단순한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리웠다.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같은 말 한 마디 말이다. 하지만 앤은 그가 겪고 있는 인생의 고통의 늪에 빠져,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넬 여유는 없었다. 점점 더 아담에게조차 따뜻한 엄마가 되기 힘들어져 갔다.


▲ 교회를 가득 메운 청중들. ⓒ 미주뉴스앤조이
요즘도 나는 생각해 본다. 만약 앤이 나에게 "여보,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도 알아. 내 옆에 남아 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더라면, 내가 앤과의 결혼 생활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지 않았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 분노가 그녀의 인생을 잠식해버렸다. 그 분노의 대상은 나였다. 가끔 난 그녀가 나를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항상 앤이 그런 상태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앤이 폭발할 때마다 앤의 잔인함은 한계를 모르고 커져만 갔다. 그런 폭발은 갈수록 자주 일어났다.

아담과의 신앙생활

한때 천주교인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앤은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세크리드하트성당에 나가던 아담과 나는 다른 교회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담과 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공동체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성당은 잘 짜인 구조 덕분인지는 몰라도 회중들에 대한 인식이 개신교만 못했다.

존 스미스 목사를 만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감리교 행사에 강사로 초대받아간 나는 화장실에서 존 스미스 목사와 마주쳤다. 어느 교회를 다니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여기 저기"라고 대답했다. 존 스미스 목사는 나에게 "강의하는 대로 사는 분은 아니시군요"라고 말했다. '이런 목사라면 괜찮겠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디애나 주 출신의 존 스미스 목사는 캘리포니아에서 목회를 하다 결혼 생활에 실패해서 인디애나로 돌아와 있었다. 이혼한 목사에게 돌아갈 교회란 아주 작고 볼 품 없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살던 사우스밴드 동네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에 있는 브로드웨이감리교회가 그가 시무하던 곳이었다. 흑인이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커다란 공장이 폐쇄된 뒤 점점 죽어가는 곳이었다.

존 스미스 목사는 그 교회를 살리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목회를 하고 있었다. 독일인 공동체가 지었던 이 교회는 건물만큼 튼튼했다. 존 목사가 교회에 왔을 때 교인 숫자는 60명을 넘지 않았다. 존 목사는 숫자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웃 주민들을 위해 아이들을 돌봐줄 어린이집을 만드는 일과 식료품 제공을 먼저 시작했다.

원래 다니고 있던 흑인 교회가 성가대 여행을 이유로 문을 닫은 것을 주일에 가서야 알고 나는 존 목사의 교회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수백 명이 예배드리도록 설계 되어있는 그 교회에는 30여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존 목사의 설교는 매우 훌륭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우리가 성찬식을 매주 하는 것이 옳은데, 브로드웨이교회가 아직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니 좀 기다려 보자는 말을 했었다. 매우 인상 깊은 설교였다.

아담의 세례

아담과 나는 그 교회에 출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존 목사는 알고 보니 예일신학교 출신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교회의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6개월가량 다닌 후 나는 존 목사에게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존 목사는 전에 다니던 교회가 어디냐고 물었다.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대답을 못했다. 내가 텍사스를 떠난 이후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따져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존 목사는 내가 전형적인 "교회에 미안해해야 하는" 교인 타입이라고 농담을 했다. 존 목사는 새신자 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정식 교인이 될 수 있겠다고 알려줬다. 나는 일 년간 새신자 교육 과정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수했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1980년 부활절에 나는 브로드웨이감리교회의 교인이 됐다. 존 목사는 부활절을 "성주간"으로 선포하고 부활절 새벽 4시에 예배를 시작했다. 우리는 불을 피워놓고 시편을 읽고 구원 역사에 관한 공연을 했으며 부활을 축하했다.

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 줄로만 알았다. 이곳은 단순히 훌륭한 예배를 위한 공동체라기보다는 공동체 그 자체였다. 교인들은 전부 정말 특별하게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담은 브로드웨이감리교회에 나가는 것을 즐겼다. 그저 즐길 뿐 아니라 여러 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담은 아직 견신례를 받지 않았다. 아담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견신례를 받을 나이의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존 목사는 아이들을 견신례를 받게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견신례 과정은 성경 공부와 교회 역사 공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1년 과정이었다. 존 목사와 견신례 후보 학생들은 1년간 4차례에 걸쳐 언약을 맺었다. 존 목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새롭게 했어야만 했던 과정을 학생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과, 교회와, 공동체와 새로운 언약을 맺은 바 있다고 강조했다. 존 목사는 학생들에게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을 맞아 마지막 언약을 맺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 아침 아담과 나는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담은 교회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너무 커서 이 언약을 맺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아담의 엄마, 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증상을 보이는 기간에 있었다. 아담은 이 순간, 이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다. 아담은 더 이상의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너무나 버거워했다. 나는 아담을 따로 설득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담에게 존 목사와 상의를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을 건넸다. 아담만 괜찮다면 존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고난주간이 시작하기 전에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아담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존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은 잡았다. 종려 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존 목사는 아담과 대화를 나눴고 나는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어떤 식으로 일이 풀려갈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앤은 한 번도 교회에 나간 적이 없었지만, 존 목사는 앤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앤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 다시 교회에 돌아가 아담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아담은 마지막 언약을 맺기로 했다고 전해왔다. 존 목사는 아담의 이야기를 동감하며 들어줬다고 했다. 자기도 아담처럼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존 목사 역시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 모두를 충족시키며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존 목사는 오히려 아담에게 "너 혼자만으로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어.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고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란다"라고 말해줬다고 아담이 전했다.

현명한 목사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담은 부활절에 교회의 교인이 됐다. 정말 훌륭한 고난주간과 부활절이었다. 새크리드하트성당처럼 웅장한 부활절 예배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담과 나는 새크리드하트성당과 브로드웨이 교회의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우리 구원의 드라마 속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느 교단의 교인인지에 대해 모호했던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부활절 아침에 내가 바라봤던 풍경, 노틀담의 스크리드하트성당의 천주교와 브로드웨이교회의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반석같이 단단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들이 없었더라면, 아담과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 나의 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다른 일은 "내 일"이었다. 앤이 아프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난 내가 하던 일을 습관적으로 해나갔다. 노틀담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다른 교수들과 연구도 하고 박사 과정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학교나 컨퍼런스에 강연을 하러 다니곤 했다.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했고, 초청을 하면 응했다. 다만 앤이 내가 집을 떠나있는 동안 발작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이 항상 상존했다. 아담은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을 취하기엔 너무 어렸었다. 나는 하루 이상 묵는 여행은 다니지 않았다.

난 강의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내가 강의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강연 원고를 모아 에세이를 썼고 그것을 모아 책을 만들었다. 초청한 측이 요구한 주제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내가 구상하고 있던 프로젝트 구상에 이런 글들을 하나씩 맞춰가는 것도 매우 생산적인 일이었다. 이런 글을 준비하며 내가 예일대학에서 배운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려고 항상 애썼다.

내 강점은 "사고하는 사람"에 있다고 생각했다. 강의는 항상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웃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것도 즐겼다. 웃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진 않았지만 복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사실 잃을 것이 없다. 그러니 진실을 말하는 데 거리낄 필요도 없다. 그런 진실은 종종 우리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만든다. 그런 놀람과 즐거움이 내 강의를 재미있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나는 소통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질문에 응대하는 것을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노틀담대학은 전화를 통해 녹음을 하면 그것을 글로 타자를 쳐서 바꾸어 주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나는 기계에 친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 강연을 듣고, 책을 읽고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통해 답변하는 것을 즐겼다. 점차 나는 이런 답변을 취미 생활로 여기게 됐다.

이런 편지 쓰기는 노틀담대학을 떠나서도 계속 됐다. 나에게 온 편지를 나는 순수한 선물로 여겼다. 답장을 쓰는 일은 나에게 있어 목회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받아쓰는 시스템을 활용한다. 매일 한 시간 정도씩 시간을 내서 사람들의 편지에 대답을 하고 있다. 내 친한 친구들도 이런 방식을 시도해 보고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내가 몰랐던 친구들을 발굴해 준다. 에세이를 쓰거나 책을 쓰는 것은 망망대해에 편지를 넣은 병을 띄우는 일과 같다. 그 병이 어디로 갈지 전혀 알 수는 없다. 아무도 그 편지를 받지 못할 때도 있지만, 몇 년이 지나 그 병을 발견한 누군가가 당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읽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읽고 질문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독서는 나의 친구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분량의 저술 활동을 하느냐고 놀랄 때가 있다. 앤을 돌봐야 하고 아담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책까지 쓸 수 있었냐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읽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나는 읽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었다. 앤이 아픈 다음부터 독서는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 됐다. 저녁을 먹고 아담이 잠이 들고 나면 앤은 나로부터 멀어졌다. 어떤 때는 자러 들어갔고 어떤 때는 자기만의 예술 프로젝트에 집중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독서뿐이었다.

나는 철학과 신학 서적을 읽었지만 소설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난 한 번 정한 저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책을 통독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이번 여름에 제인 어스틴(Jane Austen)의 모든 저서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해 여름은 조지 엘리엇, 그 다음은 콘래드의 책 전부를 읽는 식이었다.

데이비드 솔로몬은 나보다 더 지독한 책벌레였다. 나에게 이런 저런 저자들을 권해주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안토니 트롤로프(Anthony Trollope)를 소개시켜준 장본인이었다. 내가 데이비드에게 트롤로프의 책을 다 읽었냐고 물으니 그는 "아니. 그 사람의 책을 더 읽을 일이 없는 암울한 날이 오지 않게 몇 권은 아껴두는 게 좋을걸. 그 사람 겨우 마흔 일곱 권 밖에 안 썼다고"라고 대답했다. 내가 트롤로프의 책을 다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권은 남겨뒀을런지도.

아담이 떠나고

아담이 고 3때의 일이다. 아담은 공부를 곧잘 했다. 전국적인 수재들만 받는 장학금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아담은 매우 기뻐하며 그 소식을 우리에게 전했다. 나는 함께 축하했지만 앤은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만 할 거다"라고 말 했을 뿐이었다.

아담은 그 다음 단계도 통과했다. 아담은 자기 엄마의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기쁜 소식을 알렸다. 앤의 반응은 "오(oh)"뿐이었다.

프린스턴과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돌아보던 아담은 결국 하버포드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아담이 비폭력과 신학을 배우기에 그 대학이 매우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을 학교에 데려다 주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1984년 산 도요다 왜건을 타고 하버포드대학으로 향했다. 아담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아담의 기숙사 방에 짐을 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고는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울었다. 아담의 독립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인쇄하기] 2015-01-13 17: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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